Mr. Shin(정강이 뼈씨)
글ㆍ그림 넬슨 신
사람이거나 물건이거나 간에 온 세상에 있는 물질은 모두 나름대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오랜 세월 속에 어떤 물건이던 이름이 부여되고 그것을 호칭함으로써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또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물건들도 많지만, 나름대로 어떤 것이나 이름이 없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관계에서는 단순한 이름 불리기에 그치지 않고 이름으로 그 사람을 머리에 떠올리며 성격까지도 0.5초 내에 파악해 낼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사람에게 있어서의 이름은 그 장본인이 관리를 어떻게 해 나가느냐에 따라 인격이 형성된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몇 달에 한번이라도 사람을 만났을 경우에는 이름을 기억했다가 불러주면 좋으련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특히, 자기가 살지 않는 나라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르기는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이다. 누가 내 이름을 선뜻 불러주며 가까이 말을 걸어올라치면 기분이 상쾌하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상대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이름을 잘 기억하는 특기가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불러주는 사람의 배려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한국에 있던 어린 시절, 만화가가 되겠다고 장래의 포부를 정하고 족보의 학렬 글자를 따라 지어진 내 이름 신 능균을 작품 밑에 쓰려니 독자들이 좀 쉽고 인상 깊게 부를 수 있게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만든 이름이 ‘신 능파’였다. 나는 이 때 20대 초반이었는데 《얄개전》이라는 소설을 잡지에 연재하던 ‘조 흔파’ 선생이 한창 뜰 때였고 어쩐지 ‘파!’하고 나오는 정리된(?) 듯한 강한 인상이 좋았다. 다만 조흔파의 언덕 ‘파(坡)’ 자와 나의 신능파의 물결 ‘파(波)’는 뜻만 다를 뿐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름을 세상에 내놓고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이 이름을 쓰면서 생활은 그렇게 여유롭지 않았다. 미국으로 생활터전을 바꾸려고 원래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게 됐는데 이유는 여권 때문이었다.
1970년대 초에는 막내딸이 태어났는데 작명가에게 이름을 얻으러 방문했다가, 물론 딸아이의 이름도 지어 받았지만 내가 그동안 사용해온 ‘능파(能波)’라는 이름은 그다지 좋지 않은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작명가는 대신 내 본명이 아주 좋으니 앞으로 대기만성 하겠노라 귀띔해줬다.
사실 이름은 부르기도 좋아야겠지만 작명가에 의하면 글자의 획과 억양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생년월일과도 맞아야하고 직업과도 관계있다고 했다. 그 작명가의 말대로 나는 여권에 있는 이름을 사용하게 됐고 이후로는 모든 게 술술 잘 풀려나갔다. 미국을 가려던 계획도 별 장해물 없이 생각대로 이뤄졌다.
미국에서 생활하다보니 미국(서양)이름의 글자는 크게 우리나라 이름처럼 셋으로 구성돼 있음을 알게 됐다. 성(Surname 혹은 Last Name)과 중간 이름(Middle Name), 그리고 끝 이름(Given Name)은 보통 앞에 불러지기 때문에 성이 뒤에 온다. 법적인 서류가 아니면 중간 이름은 안 부르거나 약칭으로 첫 글자만 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보니 회사에서 서류에 표기할 때 나는 ‘능 신(Neung Shin)’하고 표기하게 됐고, 사람들이 이 이름을 ‘네옹 신’이라고 불렀다. 고양이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회사의 출근카드에 이름은 'N. Shin'이라 적었지만 ‘앤 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때문에 나는 이름을 새로 지어야 했고 이를 찾아낼 묘책을 떠올렸다. 그것은 우선 미국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화번호부였다. 미국에서는 '옐로우 페이지(Yellow Page)'는 상업용 전화번호부이고 '화이트 페이지(White Page)'는 개인 이름들이 실려 있다.
나는 화이트 페이지 전화번호부를 펼쳐놓고 내 이름 능(Neung)에 가까운 게 뭐가 있을까 찾기 시작했다. 우선 N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생각했다. 그러나 난관은 또 있었다. Nancy, Norm, Nill, Norman, Noar, Nick, Nicky, Nicholas, Neal, Noel 등 이름이 수없이 많았다. 또한 내 성인 '신(Shin)'을 붙여서 발음을 해봐야 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미국에서는 초년병이라 어느 이름이 여성용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나라에서 유래하는 이름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다시 성으로 이름을 찾았다. 'N' 부분을 들쳐보니 한 눈에 ‘넬슨(Nelson)'이 연속적으로 몇 페이지가 이어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 마이(Oh My!!). 이것이었다. ‘넬슨 제독(Admiral Nelson)’, 영국 해군 제독의 이름이 생각났다. ‘넬슨 신(Nelson Shin)'하고 맞춰보니 발음도 괜찮게 들렸다. 나는 이렇게 이름을 정하고 출근카드에 넬슨 신으로 표기했다. 즉각적인 반응이 있었다. 직장동료들이 넬슨(Nelson)이 아주 좋다고 칭찬을 해줬다. 이후부터 네옹 신이라 부르는 사람 없이 나는 넬슨으로 통했다. 이름은 확실히 좋은 것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명함을 받으면 잊을 만큼 오래 지난 뒤에 다시 봐도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볼 때 그렇다.
나는 당시에 영주권을 받고도 한국 이름이 여권에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부르기는 넬슨이었지만 법적인 내 이름은 아직도 네옹으로 유지되고 있었다. 이러기를 약 10년. 내가 미국 국적을 취득하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정치와도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979년 나라에 분노하고 슬픈 일이 생겨났다. 한국에는 규제 위에 더 강한 규제도 새로운 사람이 새 자리에 앉으면 많이 생겨났다. 꼴 보기 싫은 일들이 주변에서 생겨나고 나는 몹시 갈등했다. ‘자~ 이렇게 되면 나는 미국 국적의 사람이 되는 거야?’ 하고 망설여졌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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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내가 미국에 귀화하게 됐을 때 미 이민국에서도 넬슨이 좋은 이름이라며 칭찬을 했고 심지어는 ‘신(Shin)’은 뜻이 있는 글자니까 ‘신(Shinn)’으로 N자를 두개로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 왔다. 이민관이 미국은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 바꾸려면 대법원에 가야하지만 귀화 시에는 이민국에서 글자 몇 자 바꾸는 것으로 절차 없이 쉽게 끝난다고 귀띔했다. ‘신(Shin:정강이 뼈)’이라는 영어 뜻에 N자를 하나 더 넣어서 정강이 뼈를 면할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인을 하려는데 나머지 식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혼자 ‘정강이 뼈’를 면할지 모르지만 식구들의 정강이 뼈는 어떻게 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신(Shin)’이란 성을 가지고 있고 더 복잡한 외국 이름을 비교하면서 위로를 삼고 있다. 미국 이름들 중 ‘피셔맨(Fisherman:어부)’이나 ‘윈도우 워셔(Window Washer:창문 닦기)'도 있고 일본에는 ‘기노시다(木下:나무 밑에)’나 ‘족천(足川:발 닦는 개울)’ 등도 있다.
우리 SHINS(신씨가족)에게는 여러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 이름에 얽힌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미국에서 우리 식구들이 식당에 가서 이름을 미리 기재하고 순서를 기다리자면 식당의 안내가 ‘쉰파리’하고 우리를 호명한다. 한국에서의 ‘신’씨를 미국에서는 ‘쉰’으로, ‘파티(Party:일행)’는 ‘파리’라고 발음하니 우리를 찾는 이름임에 확실하다.
쉰파리든 쇠파리든 이름은 매우 중요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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