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슨 신 칼럼
스트레스와 머리카락
글ㆍ 그림 넬슨 신
벌써 2008년도 가을에 들어섰다. 금년 여름은 마른장마라서 무덥게 지났다. 그러나 어제만 해도 덥더니 어느 새 시원한 가을에 접어들었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로부터 "변절기에 건강에 유의하세요." 하고 인사를 받는다.
백발의 머리도 날리고 머리카락의 무성함이 예전과 같지는 않다. 샴푸 하나를 사려해도 모근을 튼튼히 해주는지 머리카락이 덜 빠진다고 써있는지 사용설명서를 자세히 읽어보게 된다.
앞이마 위에 머리털이 수북하면 일단은 대머리는 면한 것이다. 머리 가운데에 머리카락이 빠져 없으면 속 알 머리가 없다 하고 귀 언저리에 머리털이 없으면 주변머리가 없다고들 한다. 누군가 재미있는 말들을 만들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머리카락은 10만 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머리카락은 성장과 빠짐이 반복된다고 하며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유전이라고 한다. 항상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성장기가 지나면 머리카락이 세포분열을 멈추고 빠지기 시작한다. 이것을 헤어 사이클(Hair Cycle)이라 하고 두피가 건강 할 때가 머리카락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이다. 이 밖에도 두피의 영양 결핍으로 또는 스트레스에 의해 머리카락이 빠지며 90% 원형 탈모를 가져온다.
내 생애에 확실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당시 내 생애에 가장 긴장되고 어려운 일들을 극복했다고 할 수 있다. 어찌된 일인지 그때는 날아다니는 나방 같은 것이 머리털 속을 쑤시고 들어가려는 그런 느낌이 자주 들어 손으로 머리 속을 쓰다듬으며 벌레를 털어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벌레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하루는 또 그런 일이 일어나 이번에는 벌레를 잡을 요량으로 빗으로 빗듯 손가락들을 머리카락 속으로 집어넣고 힘차게 훑어 내렸다. 그러고는 손바닥에 잡히는 것이 있어서 보니 꽤 큰 나방이 아닌가! 놀라서 그 나방을 털어버리고 나방이 있던 뒷머리를 만져보니 머리가 미끈미끈한 게 머리카락이 빠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반복해서 그 곳을 만져보며 피부과로 뛰어갔다.
의사는 그 부위를 보자마자 나에게 질문했다. 나는 또 한번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 최근에 이혼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니오."
"그러면 파산선고를 하지 않았는지요?"
"아닌데요."
이런 놀라운 질문만 받으면서 나는 왜 이런 일이 생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의사는 이런 현상은 충격적인 고민거리가 있을 때 흔히 생기는 일이라면서, 미국에서 이런 증상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을 흔히 '실버 코인(Silver Coin)'이라 부른다고 했다. 너무 신경 쓰며 살지 말라는 충고까지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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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때는 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긴장과 어려움을 갖고 있을 때였다. 언어가 자유롭지 않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나타내지 않으려던, 혼자만의 고통의 결과가 탈모에까지 이른 것이다. 의사는 내 머리에 호르몬 주사를 놓으면서 몇 주 안에 정상적인 머리털이 나올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며칠 지나자 자주 만져보는 그 자리에 까칠까칠한 새 머리가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일들은 오랫동안 자주 일어났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런 나의 고통을 겉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속이 상해 흥분할 때도 분노를 가슴 밖으로 내보이지 않았다.
한번은 애니메이션 성우 캐스팅을 해야 할 때였다. 이런 경우 대개 보이스 액터스 길드(Voice Actors Guild)라는 조합에서 여러 명을 추천한다. 그러면 추천 받은 성우들은 내게 와서 한 사람 한 사람 오디션을 받는다. 이 캐릭터에는 어떤 사람의 목소리가 어울리겠다, 어떻겠다 판단하고 성우를 쓰게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 성우를 선정하고 진짜 녹음을 하게 되었다. 원래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그림을 다 그린 다음 목소리를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사를 녹음한다.
리코딩 세션(Recording Session)이 있는 날이었다. 처음 몇 대목부터 성우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Oh, no, no, don't do it(안 돼, 그러지 마)!"
이런 장면이었다.
기껏 고심해서 선정했건만 기대에 못 미쳤다. 무엇보다 부정의 뜻을 얘기하는 데 전혀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소프트하게 음성을 깔았다. 실패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우리 식으로 손사래를 치며 목소리를 높여주기를 바랐다. 말하자면 한국에서 "아, 그거 하지 마! 그러지 말라니까!" 하며 화를 내는 기분을 떠올렸던 것이다.
나는 녹음실의 버튼을 눌렀다. 적당히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스튜디오의 문이 열리면서 성우가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 부분은 그렇게 하지 말고 'Oh, no, no, don't do it!' 이렇게 세게, 감정을 넣어서 해줘."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데 성우가 다른 동료에게 기분 상한 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저 친구 왜 저래? 도대체 뭐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리고 녹음은 중단됐다. 아예 거절하는 태도였다. 무슨 일이라도 난 듯 웅성거리는데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정당한 지시를 무시하면 그를 교체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 상황에서 왜 감정을 넣어야 되는지 설명하고, 설득해야 했다.
그 때 성우 경험이 있는 녹음실 책임자가 나섰다.
"미스터 신, 무슨 문제요?"
나는 스크립트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이 부분에 표정을 넣어서 억양을 높이라고 했는데……."
그는 대뜸 내 말뜻을 알아듣고 말했다.
"아하, 미국에서는 'No'라고 할 때 보통 그렇게 감정을 싣지 않아요. 남에게 거절하는 뜻이니까 오히려 기분 상하지 않게 해야지."
그리고 저 사람과 그냥 일을 해나가는 게 좋겠다고 귀띔했다. 이렇게 문화적인 배경의 차이 때문에 얼굴 붉혀야 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어물거리며 뒷걸음질치지 않았다.
때때로 나는 나 자신을 '뭘 잘 모르는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이 말은 겁이 없는 성격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돈키호테 식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원칙대로 밀고 간다. 일단 올바른 방향이다 싶으면 내 식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고집쟁이라는 말도 듣지만, 결코 엉터리 고집불통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마블사에서 라인 프로듀서로 텔레비전 시리즈 물인 <트랜스포머>를 120편쯤 만들 무렵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면서도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어쩌면 그때야말로 내 인생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돌아본다. 나는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내 일에 만족했고 보람을 느꼈다. 내가 만든 작품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다.
"저건 내 새끼야(That's my baby)."
'베이비'란 감독이 흔히 자기 작품을 애지중지 아껴서 부르는 말이다.
나는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 좀 걱정스러운 것들도 눌러 참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했다. 그 후 내 탈모증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까칠까칠한 새로운 머리카락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는 자기 스스로 만드는 가장 나쁜 습관이라고 규정지었다.
‘남에게 Stress는 보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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